– <누워있는 조각가의 시간>, 2016
Float 6, 헤적프레스, 2017


천문가가 내게 목성을 봐 보라고 했다. 나는 시커먼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반사망원경의 접안렌즈에 눈을 갖다 대면서, 조약돌을 닮은 목성의 반들반들한 무늬를 생각했다. 그런데 망원경 너머 저 멀리에 그런 건 없었다. 작고 하얗고 어른어른한 불빛 하나가 보일 뿐. 천문가가 말했다. 실망하지 마세요, 사진에서 보던 거랑 다르겠지만 그게 목성이에요.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사진에서 보던 거랑은 달랐지만 그게 살아있는 목성이었으므로.

물리학자는 영화의 아버지 중 하나로 불리지만, 1895년 그랑 까페에서 그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설령 그가 살아있었다 해도 영화가 완성해낸 운동의 환영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생전에 맨눈으로 태양의 운동을 관측하다가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다게레오타입으로 찍힌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지금, 나는 물리학자의 망막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상상해본다.

물리학자가 25초 만에 자신의 망막을 태웠다면, 누워있는 조각가는 팔십 평생 자신의 폐를 태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누워있는 이유가 타버린 폐 때문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숨쉬기 힘들어 침대 난간을 붙잡고 괴로워하던 그는, 자신의 고통이 그동안 만들었던 ‘나쁜 작품’ 때문이라고 했다.

어느 날 병실을 찾았더니 누워있는 조각가가 태블릿 컴퓨터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가 찾던 것은 야구 중계였다. 누워있는 조각가의 긴 몸집만큼이나 길어진 손톱은 그의 손끝이 태블릿의 액정 위에 닿는 것을 방해했다. 에라이. 누워있는 조각가가 성질을 냈다. 누워있는 조각가의 손끝이 사물의 표면을 촉각 하기 위해 할 일은 손톱을 깎는 것이다.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 탁, 탁, 손톱깎이의 지렛대를 당겼다. 그리고 손끝에 맨살이 드러나는 과정을 지켜봤다. 갑자기 누워있는 조각가가 야야, 소리쳤다. 자세히 보니 잘린 손톱 바로 아래로 퇴적물처럼 기형적인 살점이 솟아올라 있었다.

손끝에는 또 다른 손끝이 있었다. 누워있는 조각가의 비밀을 발견했을 때, “너는 조각가의 손을 닮았다”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닮았다는 그 손의 조각가는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으므로, 그동안 나는 그에 관한 사소한 궁금증이 많았다. 묵고 묵은 비디오테이프를 꺼내보았다. 사라진 조각가는 뒷짐을 지고 성큼성큼 걸어나가거나, 등 뒤로 손뼉을 치기라도 할 듯 상체를 크게 젖히며 웃었다. 곁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할 때는 귀를 세웠다. 검지를 길게 펴서 두꺼운 안경을 밀어 올렸다. 걷고, 숨 쉬고, 생각하고, 고개 들고, 웃고, 말했다.

사진에서 보인다면 그게 바로 진짜라고 믿던 시절, 로댕은 반대로 말했다. 예술가가 진짜고 사진은 거짓말쟁이라고. 현실에서 시간은 멈추지 않아. 그러니까 하나의 순간이 또 다른 순간으로 변하는 과정이 진짜 시간이고, 달리는 말의 네 다리가 모두 공중에 떠 있는 순간은 가짜 시간이야. 살아있는 시간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흐르는 것.

조각가가 쓰던 작업실에 갔다. 선반 위에는 석고 모형들이 빼곡히 쌓여있었다. 이러저러한 형상의 덩어리들. 저 덩어리들이 사라진 조각가가 남기고 간 전부라고 했다. 조각가의 손끝은 덩어리의 표면 위에 닿았을 것이다. 덩어리의 표면은 덩어리의 내면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덩어리의 내면은? 조각가의 손끝에 또 다른 손끝을 갖다 대보면, 덩어리의 내면이 가리키는 게 뭔지 알 수 있을까? 망원경 너머 어른어른한 목성의 얼굴을 바라보듯, 손끝의 촉각이 덩어리의 표면 위로 미끄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