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사람의 사진> 에필로그, 2015
어떤 사람의 사진, 서울시창작공간 성북예술창작센터, 2015


한 장의 사진을 골랐다. 민주, 현주와 이 사진을 공유할 수 있을까?

사진의 하단에는 케이크에 꽂아놓은 초처럼 나무줄기가 가지런히 솟아올라 와 있다. 상단에는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있는 세 그루의 나무가 보인다. 햇살이 이쪽으로 비춰들어온다. 때는 8월 여름이었고, 장소는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폴 세잔의 집. 친구와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누나와 그의 엄마가 거기에 함께 갔다. 모두 정원의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나는 카메라를 들고 두리번거리다가 인적이 드문 정원 끝에 다다랐다. 텅 빈 하얀 막을 보았다. 그 위로 투영된 나무 그림자가 한여름 그늘에서 부는 미세한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그 장면이 아름답다고 느꼈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사진 중앙에 자리 잡은 나무 그림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작 사진을 찍게 된 이유가 그것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나는 민주와 현주에게 말했다. 너희랑 사진 찍는 과정은 정말 즐거운데, 그 사진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잘 찍었는지 얘기해주고 싶을 때마다 그게 잘 안돼서 답답해. 현주는 자신에게 사진을 가르쳐줬던 어느 사진가가 하던 것처럼, 사진 위에 보이는 것들을 손바닥 위에 그려줘 보라고 충고했다. 나는 말했다. “하지만 사진 위로 보이는 것 중에는 손바닥 위에 그려줄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사진에는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거든.” 그러자, 가끔 지나치게 명쾌해지는 현주가 말했다. 포기하세요. 그런 건 그냥 포기하세요, 라고. 현주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저 평평하기만 한 이미지로 변신한 나무처럼, 사진은 눈 외의 모든 감각을 무색하게 만든다. 안 보이는 사람과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청력을 완전히 잃은 청각장애인에게 멜로디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의미한 것일 수 있다. 음악에는 적어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소리의 운동이 있으나, 인화지의 질감은 결코 사진에 대해 말해주지 않으므로.

그렇다면 나는 폴 세잔의 집에서 찍은 나무 그림자 사진에 관해 민주와 현주에게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이 나을까? 마치 그 사진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내가 민주와 현주에게 어떤 사람에 관해 알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대답했다. 궁금한 건 바로 외모를 제외한 “모든 것”이라고. 만일 ‘외모’라는 단어를 ‘표면’으로 치환한다면, 아이들이 알고자 하는 세상은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다른 것들일 것이다. 나는 한 장의 사진을 앞에 두고서도, 그것의 표면을 떠나 그 안쪽, 혹은 그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면에서 보여지는 것들에 관한 시각적 묘사는, 시각장애인의 손에 들린 한 장의 사진을 한없이 지루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시각 세계와 전혀 닮지 않았다. “나는 시력(sight)을 잃었지만, 시각(vision)을 잃지는 않았다.”1 – 나는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 사진가 앨리스 윙월(Alice Wingwall)이 했던 이 말을 자주 상기했다. 그리고, 빛이 처리되는 시각체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이미지가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미지가 시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각화의 과정을 통해 태어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머릿속에서 시작된다.”2

민주, 현주가 소설가가 써준 어떤 사람의 사진에 관한 원고를 읽고 있던 어느 날 저녁, 나도 어떤 한 사람의 사진 한 장을 아무렇게나 떠올려봤다. 보지 않고, 그저 머릿속으로. 떠오른 사진 속의 사람은 오래된 내 친구다. 그는 양팔을 젖히고 누워있다. 마치 폴 세잔의 집에서 보았던 팔 벌린 나무처럼. 친구의 파란 티셔츠 겨드랑이에 빵꾸가 났다. 사진 속 친구의 시선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나를 향해있다. 그의 시선, 그 눈빛은 세상에 실망이라는 단어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그 사진을 떠올리고, 사진은 내게 친구의 눈빛을 상기시킨다. 겨드랑이에 난 빵꾸는 친구를 떠올리는 나를 미소 짓게 한다. 그러고 나니 친구가 몹시 그립다. 더이상 나는 한 장의 사진 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친구는 수백 개의 기억들로 뭉쳐진 덩어리로 변신한다. 그때 나는 민주와 현주에게 어떤 사람의 사진에 관해 설명해주는 것을 포기하고, 그 사람에 관한 기억들을 덩어리째 전달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것은 공유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므로. 카프카는 썼다. “하지만 얼굴이란 천 개의 사진을 보아야만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3 이 말은 어쩐지 천 개의 사진조차도 얼굴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는 소설가의 역설처럼 들린다.

1. Sight Unseen : International Photography by Blind Artists, UCR ARTSblock, 2009
2. ibid.
3. F. 카프카,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1916년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