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홍태림


내가 전명은 작가를 처음 만난 곳은 올해 가을 성북예술창작센터에 위치한 갤러리 맺음이었다. 갤러리에는 전명은 작가가 일곱 명의 청각장애청소년들과 5개월간 진행한 이미지 실험에 대한 결과물을 담은 <블랙박스레코더> 전시가 열려있었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검은 상자 안에 손을 넣어서 사물을 만지며 그림을 그리거나, 가려진 사진의 바깥을 자유롭게 상상하며 그리기도 했고, 바늘구멍 사진기를 이용해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는 전시장에 진열된 아이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방식으로 각자에게 주어져 있던 시각적인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명은 작가는 나에게 ‘블랙박스레코더’ 프로젝트에 대해서 차근하게 설명해 주었고, 나 역시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아이들의 머릿속에 그려졌던 상상의 세계에 천천히 다가갔다. 나는 ‘블랙박스레코더’를 보고 나서 전명은 작가에게 모종의 온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이 온기가 삶과 예술이 서로 마주치는 모든 과정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블랙박스레코더’ 프로젝트의 화자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이들이기 때문에 애초에 전명은 작가의 시선은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앞서 내가 전명은 작가에게서 느꼈던 온기는 분명 감지할 수 있는 무엇이기는 했지만 선명하게 다가오는 무엇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전시 관람이 끝난 후에 전명은 작가와 나눴던 대화와 그녀의 작품 활동이 기록된 인쇄물들을 살펴보면서, 내가 느꼈던 희미한 온기가 다양한 결들을 드러내며 선명하게 감지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내가 봤던 전명은 작가의 다양한 작품 활동 중에 몇 갈래의 연작들이 올해 12월 오래된 집이라는 공간에서 선보여질 예정이다. 이 글은 오래된 집 공간에서 열릴 전명은 작가의 네 번째 개인전 <그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에 포함되는 작업들에 대한 나의 시선을 담은 것이며, 동시에 내가 그녀에게서 막연하게 느꼈던 온기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내가 먼저 이야기해 보고 싶은 작업은 이번 전시제목과 동일한 제목을 가진 ‘그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이다. 이 작업은 한 장의 흑백사진을 통해서 제작된 설치 작업이다. 이 흑백사진은 전명은 작가의 아버지가 사진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에서 전경에 속하는 풀들의 기울어짐과 중경에 위치한 그녀의 아버지가 몸을 기울인 각도는 서로 긴장감 있게 연동되어있다. 이어서 전경과 중경의 수직적인 기울어짐이 주는 긴장감은 후경의 수평적인 언덕 능선의 기울어짐과 거듭 어우러지며 긴장감을 배가한다. 나는 이 사진의 구도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거쳐서 그녀의 아버지가 사진촬영을 위해 사진기를 섬세하게 눈에 밀착시킨 모습에 다시 주목해 본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를 골똘히 바라보는 도중에 과거의 한순간이 나의 현재와 포개지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혹시 그녀의 아버지가 사진기를 통해서 바라보고 있던 대상은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현상은 내가 이 사진을 바라봄으로서 모종의 연속된 관계 안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진을 처음 보게 된 내가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 경험이 사진을 바라보게 될 다른 누군가에게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이 낯선 사진과 더 가깝게 마주하기에 앞서서 여러 가지 의문으로 거리를 두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흑백사진에 등장한 그녀의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리고 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왜 그녀의 아버지를 촬영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라든지. 혹은, 왜 우리가 이 사진을 구성하는 두 시선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좋은 사진을 바라보는 것이 복잡하고 불가해한 현재의 삶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흑백사진의 사실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주된 초점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진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된 전명은 작가의 아버지가 찍힌 사진도 사진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 사진은 촬영자와 피사체인 그녀의 아버지, 이 사진을 보게 되는 사람들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의미를 가진다. 이와는 반대로 상업적 사용을 염두에 두고 미리 촬영해서 사용권을 판매하는 스톡사진이나 언론에서 사실을 은폐하고 폄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편향된 보도사진은 그 자체로 사진이기는 하지만 사람 간의 유기적인 관계는 부재한 사진이다. 특히 편향된 사실을 확언하는 중심주의적인 보도사진은 관계의 부재를 넘어서 타인의 삶을 짓밟는 악의적인 의도가 깔려있다. 따라서 나는 사진과 마주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할 수 있는 관계지향적인 사진이 의미 있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같은 사진을 통해서 복잡하고 불가해한 현재의 삶을 이해하고 구체화할 수 있다. 이렇게 내가 사진과 사진을 보는 행위가 내포하는 관계성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는 것은 ‘그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 작품의 구성이 앞서 내가 이야기한 내용과 관련지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담긴 사진이 프로젝터를 통해서 전시장의 벽과 공중에서 회전하는 유리판 위에 투사될 때, 이 이미지들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도 없다. 여기서 이미지 간에 위계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방식 간에 중심주의가 배제되었음을 뜻한다. 우리는 차등 없이 사방에서 맺히는 시선과 자신의 시선을 연결함으로서 현재의 삶과 대면하는 경험을 시도해 볼 수 있다. 그 경험은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지평 위에서 위계 없이 유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가 전명은 작가의 이후 다른 작업을 해나가는 방향을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전명은 작가가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일 다른 갈래의 연작인 ‘새와 우산’이나 ‘사진은 학자의 망막’, ‘Optographic’도 ‘그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에서 포착되는 유의미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제 효과맨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새와 우산’에 대해서 살펴보자. 효과맨은―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폴리는 유성영화 초창기 할리우드에서 도구를 이용한 효과음 연출기법을 개척한 잭 폴리(Jack Foley)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라디오 드라마나 영화 그 밖에 여러 가지 분야에서 필요한 소리를 전혀 예상 밖의 도구로 만들어 내는 사람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효과맨은 눈 밟는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녹말가루나 고무장갑으로, 수풀 헤치는 ‘쉭쉭’ 소리를 러쉬필름으로, 독수리처럼 커다란 새의 날갯짓을 우산을 접었다가 펴는 소리로 표현한다. 이처럼 효과맨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예상 밖의 도구들을 통해서 연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수용자의 감정과 결합하는 다양한 소리들이 존재한다. 효과맨은 이 중에서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소리를 다양한 도구를 통해서 더 생생한 소리로 만든다. 이 때문에 우리가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에서 접하는 다양한 소리들은 촬영과 함께 녹음된 소리이기보다 효과맨에 의해서 재창조된 소리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에서 듣게 되는 다양한 소리가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과 다른 소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소리들은 실제 행위를 통해서 수반되는 소리보다도 더 생생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영화에서 찌개가 끓는 장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유리잔 위에서 부딪히는 접시와 달아오른 인두에 젖은 휴지가 닿으면서 만들어진 소리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가 효과맨이 창조하는 소리의 이면에 감추어진 비밀을 발견하게 될 때, 소리를 듣는 행위 자체에서 대상이 가시화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서 머릿속에서 작동하는 해석체계에 의해서 대상을 가시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기존에 본 것과 알고 있는 것을 통해서 대상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작동하는 해석체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전명은 작가가 청각장애청소년들과 진행한 ‘블랙박스-오브제’ 연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검은 상자 안에 숨겨진 사물이 아이들의 손을 통해서 그림으로 표현되었을 때 도출된 이미지들은 효과맨이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만큼이나 우리의 예상에서 벗어나 있다. 전명은 작가는 ‘새와 우산’ 연작에서 효과맨이 소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표면으로 끌어올림으로서 우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해석체계가 하나의 체계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결들이 위계 없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기존에 인식하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하게 대하던 대상들을 다른 방식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두려운 일인 동시에 매우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 즐거움을 지켜나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대상과 다양한 가능성을 통해서 관계 맺는 삶을 보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음으로 살펴볼 전명은 작가의 연작은 ‘사진은 학자의 망막’이다. 이 연작은 천체를 관찰하는 아마추어 천문가와 그들이 직접 제작한 관측 도구들에 관한 이야기다. 전명은 작가는 ‘사진은 학자의 망막’ 연작을 통해서 천체를 보기 위해 순수한 열정을 쏟아내는 아마추어 천문가들의 삶을 담아냈다.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온갖 경이로움과 비밀을 간직한 천체를 더 잘 보기 위해서 각종 관측 도구를 사용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천체를 더 가깝게 볼 수 있도록 하거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천체현상을 가시화시켜 준다. 아마추어 천문가는 왜 천체를 바라보는 것일까. 예를 들어,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북극성은 우리에게서 약 430광년 떨어져 있다고 알려졌다. 현재 우리가 보는 북극성의 빛은 북극성으로부터 빛의 속도로 약 430년 전에 출발한 빛이다. 결국, 우리가 밤하늘에서 보는 별빛은 지금부터 수백만 년, 수십억 년 전에 출발한 과거의 모습이며 그 별의 현존 역시 정확히 알 수 없다. 나는 이런 점에서 탄생과 죽음이 비밀스럽게 뒤섞인 아득한 천체의 별빛을 바라본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추어 천문가들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천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이들이 천체를 단지 좀 더 잘 보기 위해서 들이는 수고는 욕망보다는 열망에 가깝다. 우리는 보통 열망과 욕망이라는 단어를 중복된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이는 더 세밀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열망과 욕망은 누군가가 어떤 대상을 강렬히 원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지점이 있지만, 강렬히 원하는 대상을 어떠한 태도로 마주하느냐에 따라서 구분된다. 열망은 강렬하게 원하는 대상이 그것을 갈구한 자의 내면에서 완결되기에 자족적이다. 이와는 반대로 욕망은 나 이외의 대상과 복잡하게 연결된 관계를 통해서 작동된다. 나는 아마추어 천문가들이 각종 도구를 통해서 아득한 천체를 관측하는 행위가 어디까지나 자족적인 행위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족적인 행위가 바로 열망이고 혹은 순수한 열정이다. 전명은 작가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아마추어 천문가들의 삶은 보고 싶다는, 알고 싶다는, 강렬하고도 집요한 열망으로 수렴된다. 이 열망은 아마추어 천문가가 다루는 도구를 통해서 바라본 천체뿐만 아니라 천체를 바라보기 위해서 쓰이는 도구 그 자체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도구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열망은 카메라 박물관을 다룬 ‘Optographic’ 연작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전명은 작가가 이 연작의 제목을 Optographic이라고 정한 이유는 인간의 보고자 하는 욕망이 광적인 상태까지 치달은 결과물이 바로 망막 위에 이미지가 있다는 망상인 Optography와 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Optographic’에서 살펴볼 수 있는 수많은 카메라들은 광학도구이기 이전에 대상을 더 잘 보고자하는 우리들의 욕망 혹은 열망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카메라 그 자체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전명은 작가의 말대로 여행보다도 머리맡에 붙여놓은 지도를 바라보는 즐거움에 비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욕망과 열망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개인이 욕망할 것을 정답처럼 지정해주는 사회는 욕망의 획일화를 야기한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욕망이 획일화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 문제는 각자의 삶에서 자족적인 행복, 즉 열망에 대한 경험이 부재하다는 것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열망을 경험해보지 못한 개인은 자신의 삶에서 주어를 생성하지 못한다. 삶은 문장을 만드는 것처럼 동사도 필요하고 목적어도 필요하다. 주어 이외에 다른 문장요소를 욕망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열망과 욕망이 어우러진 문장을 표현할 수 있을 때 더 좋은 삶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사회라는 맥락으로 바꿔 말하면, 우리는 개인이 고유한 열망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공감하고 유지할 수 있는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전명은 작가가 아마추어 천문가들과 함께한 시간의 향취가 묻어나는 사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열망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열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나마 낫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슬픈 것은 열망이 소멸하는 것이다. 전명은 작가의 사진을 통해서 만난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열망의 불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명은 작가의 사진을 보면서 아마추어 천문가들에게 고마운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아직 열망을 잊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앞서 ‘그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를 통해서 사진과 사진을 보는 행위의 관계성이 복잡하고 불가해한 현재의 삶을 이해하고 구체화하는 것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이러한 관계성은 우리가 아마추어 천문가와 효과맨의 삶을 담은 전명은 작가의 사진과 가깝게 마주했을 때에도 경험할 수 있다. 아마추어 천문가와 효과맨의 삶은 우리의 현재와 어떻게 마주치게 되는 것일까. 효과맨이나 아마추어 천문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무엇이기는 하지만 둘 다 사회의 동심원적인 욕망의 구조에서는 벗어나 있는 것들이다. 효과맨 직업은 교육과정이나 고용체계가 점차 안정화되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워낙 생소한 분야이다 보니 대중적으로 선호되는 직업은 아니다. 아마추어 천문가의 활동은 생계와 연관성이 없다는 점에서 동심원적인 사회의 욕망구조 안에서 일반적으로 용납되기 어렵다. 이처럼 전명은 작가는 개인의 욕망을 획일화하는 사회구조 속에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열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그녀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와 공유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전명은 작가에게서 느꼈던 온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나는 앞서 ‘블랙박스레코더’ 프로젝트에서 전명은 작가의 고유한 시선은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에 포함되는 연작들은 ‘블랙박스레코더’ 프로젝트에 비해서 전명은 작가의 시선이 적극적으로 드러나지만, 작업의 중심에는 여전히 작가 본인이 화자로 위치하지 않는다. 작업의 중심에는 전명은 작가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삶이 서 있다. 전명은 작가는 작업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의 옆에 서서 그들이 보고, 말하고, 느끼는 것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 노력의 과정은 대상과의 만남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삶과 신실하게 감응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내가 경험한 예술계는 주어가 부재한 성공에 대한 욕망을 서로 부추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자생존의 논리를 꽤나 내면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예술가들은 자기도취적 인정투쟁에 골몰하게 되고, 그럴수록 삶과 예술은 분리되고 위축된다. 전명은 작가가 작업을 통해서 대상과 만나는 태도는 삶과 예술이 서로 위계 없이 관계를 맺는다. 나는 전명은 작가의 작업에서 삶과 예술이 마찰하며 생성하는 온기를 느낀다. 나는 이 온기 안에서 온갖 위기에 직면한 우리의 삶이 조금 더 자유롭고 행복한 방향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