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사진 찍어보기 전에는 그것을 정말로 봤다고 자신할 수 없다.
– 에밀 졸라,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사진의 역사>에서 인용

 

인간은 사진을 통해 더 멀리, 더 가까이, 그리고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구현해왔다. 사진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했던 욕망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진의 혁신은 사라지는 시간의 자취를 가시화시키고, 나아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현상을 시각화시켰다는 데에 있다. 살인자가 가해자의 망막 면 위에 남은 자신의 영상을 지우기 위해 그 눈을 망가뜨리던 것과 반대로, 19세기 과학자는 망막 면 위에 남아있는 이미지를 사진 위로 옮겨보고자 했다. 이들은 두 가지를 놓쳤다. 먼저 인간 시각체계에서 이미지는 절대로 가시화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사진의 역할은 이미지의 가시화를 넘어, 그것의 시각화에 있다는 점이다. 망막 사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눈 위에 남겨진 이미지가 아니라, 시각화된 망막의 미세 혈관일 것이다. “사진은 학자의 망막이다.” : 태양표면의 촬영에 성공한 천문가 쥘 잔슨(Jules Janssen)이 1888년에 남긴 이 말은, 사진이 보유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 세계에 대한 경탄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의 감각 세계에서는 표출되지 않던 그것은, 마술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던 현실이었다.

불완전한 인간의 눈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광학기기들은 보기 위한 도구이지만, 또한 그 자체로 바라보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사진보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여행보다도 머리맡에 붙여놓은 지도를 바라보는 즐거움에 비할만하다. “거기”에 있는 순간보다도, 그것을 상상하거나 욕망하는 순간을 즐기는 이들은 탐험가라기보다, 몽상가이다. 같은 맥락에서, 광학기기가 매력적인 까닭은 그것이 보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기 때문이기 이전에, 보고자 하는 욕망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