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박스레코더> 프로젝트 에필로그, 2014


어느 날 나는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이 거의 대부분 보는 행위를 통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알고 나니 세상을 제대로 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넓고, 더 깊게 ; 가려진 시야의 너머와, 보이지 않는 사물의 이면을 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시각 세계의 좁은 문을 확장할 수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를 실험해보고자 했다. 누구와 함께?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청력을 잃으면서부터 시각으로 지배된 감각 세계 속에서 살고있는 청각장애인들이 내게는 가장 적절한 파트너로 생각되었다. 그렇게 모인 일곱 명의 아이들은 모자란 청력에 대한 불만보다는, 자신의 뛰어난 시각적 장점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관을 갖고있었다.
내가 수화로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수업시간마다 수화통역가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셨다. 그런데 가끔은 수화통역이 쓸모없을 때도 있었다. 통역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구화(lipreading)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통역의 중간 수단을 거치지 않는 직접적인 대화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대부분 구화에 능했다. 나는 아이들이 그들 고유의 아름다운 수화언어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원하면서도, 통역가 선생님이 안 계실 때는 구화 덕분에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구화와 수화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 무려 백여 년의 시간 동안 공식 석상에서의 수화사용이 금지되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떠올랐다. 청각장애인의 사회유입이 그 명분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들었을 때 나는 소수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만일 수화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시각장애인의 세계를 시각이 결여된 세계라고 정의한다면, 청각장애인의 세계는 청각 이전에, 언어가 결여된 세계라고 정의내려야 했을 것이다. “청각장애 자체는 불행이 아니다. 불행이 시작되는 것은 의사소통과 언어가 단절되었을 때다” *.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타인과의 의사소통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소통을 위한 언어의 부재가 훨씬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
내가 처음 장애인의 감각 세계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수화언어였는데,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바로 수화언어가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화는 청각장애인의 시각 세계를 표현하는 매체이자 그들의 세계를 더욱더 시각화시키는 동기이기도 하다. 수화의 풍요로운 어휘는 청각장애인의 시각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수화의 손짓은 망막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머릿속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붓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던 폴 세잔의 말을 조금만 바꿔서, 수화로 말하는 것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5개월은 이 모든 갖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답을 찾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부족한 시간의 길이를 그들의 재능과 열정으로 꼼꼼하게 채워준 일곱명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따뜻한 신뢰의 힘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어머님들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 “Deafness as such is not the affliction ; affliction enters with the breakdowwn of communication and language. Oliver Sacks”,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김승욱 번역, <목소리를 보았네(Seeing voices)>, (주)알마, 2012, p.166.